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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Anyting

롬이 이야기

올 해로 16살이 된 롬이는 할아버지 강아지다. 녹내장으로 한 쪽 눈이 보이지 않고, 다른 한 쪽도 시력이 없어 앞을 완전히 볼 수 없다.


눈이 안 보이게 되면서 롬이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고, 그만큼 집안 풍경도 따라서 많이 변했다.


침대에서 함께 자는 걸 좋아하는 롬이를 위해 침대를 한쪽 벽에 붙이고 다른 쪽도 안전하게 울타리를 쳤다.


롬이가 부딧히면 다칠만한 물건은 모두 치우고, 물을 찾아서 마시지 못하기때문에 소스통에 물을 채워 아기 우유 주듯 물을 먹인다. 밥도 마찬가지다.  건강에 좋다는 비싼 습식사료를 사서 밥알과 비벼 직접 조금씩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어준다.


화장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체력이 아닌 녀석은 침대에서 쉬다가 쉬야가 마려우면 낑낑대며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않을 땐 그냥 볼일을 볼 때가 있어서 아기들이 쓰는 기저귀를 채워주었다. 애견용보다 유용하다고 해서 매직이라는 카피가 붙은 고급 기저귀 사다 쓰고 있는데 쓰레기통만 보면 마치 진짜 내가 아기엄마라도 된 거 같다.




가끔은 롬이가 이유없이 밤새 울어도 우리까지 잠을 설칠 때도 있다. 사실 가끔이 아니라 대부분의 밤을 제대로 못 잔다. 어릴 때 11살 차이나는 남동생이 밤새 울어서 힘들었던 적이 있는데 요즘 롬이덕분에 그 때 기억이 새록새록 날 정도다.


이렇게 신경쓸 거리가 많지만 사료를 새알처럼 만들어 먹일 때... 찹찹거리며 받아먹는 롬이를 보면 힘들었던 일들이 스르르 녹는다.


그런데 오늘은 롬이가 온 몸이 축 쳐져서 만취한 사람처럼 서지도 기지도 못하고 퍼져버렸다. 눈을 부자연스러운 박자로 빠르게 끔뻑거리고, 싫어하는 눈꼽떼기를 해도 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제일 잘 먹는 바나나를 조금 떼어 입에 묻혀보았는데 작고 빨간 혀를 낼름거리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꾸준히 먹이던 약인데 약이 몸에 맞지않았나 하다가도...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픈데가 없는게 이상할 거란 생각에 숨을 못 쉬는 것은 아닌지 조금씩 관찰하며 곁을 지켰다.


1~2시간 가량이 지나니 조금씩 몸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내가 좋아하는 귀여운 혓바닥도 바나나를 맛보려고 입안과 밖을 들락날락거렸다.




오늘 나는 새삼 더 느꼈다. 내가 정말정말 롬이의 혓바닥, 그 부드러운 느낌을 좋아한다는 것을. 윗니 아랫니 사이에 꾹 물려 경직되어있던 혀가 스르륵 하고 내 검지손가락 끝을 핥았을 때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롬이 혓바닥이 다시 나와서 너무 좋아서 그래." 라며 엉엉 못생기게 울었다.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지만 역시나 롬이가 우리와 더 오래 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도 아프지않았으면 좋겠다. 매일 매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 작고 붉은 혓바닥을 내밀며 바나나도 잘 먹어줬으면 좋겠다.